생물화학무기와 침묵의 기억들

한국전쟁기 세균전의 진위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인 주제이다. 1952년 2월 유엔 총회에서부터 공산진영은 공식적인 항의를 시작하였고,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생물화학무기가 사용되었음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 장면들에서 세균전을 다룬 텍스트는 남한과 북한 모두 희소한 편에 속한다. 생화학무기와 세균전은 폭격과 더불어 한국전쟁을 읽는 주요한 키워드이다. 이들 두 키워드 모두 ‘미국’이 표상하는 강력한 테크놀로지의 경험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폭격이 압도적인 화력과 물량공세로 형상화되는 것에 비해 세균무기는 테크놀로지와 비도덕성의 음험한 결합으로 그려진다. 즉, 지난 시기에 자행되었던 일본의 생체실험이나 나치의 가스실과 궤를 같이 하는 비인간적 기술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균전 텍스트들에서 세균무기를 활용하는 ‘적’은 윤리의식이 부재한 자신의 기술로 인해 파멸에 이른다.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무기에 대한 불안은 간첩 혹은 내부의 적이라는 은유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한국전쟁기의 세균전 논쟁과 그 경험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식과 그 것이 초래한 불안의 형상화를 검토할 수 있는 한 예가 된다. 이 글은 한국전쟁기 세균전에 관한 남한과 북한의 텍스트를 확인함으로써 제어할 수 없는 기술에 대한 불안과 이에 응전하는 은유들을 검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