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敞郡 龍溪里窯와 “太平壬戌” 銘 瓦片 및 塼築窯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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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溪里窯址와 인접한 建物址에서 출토된 “太平壬戌”銘 瓦片 龍溪里窯址의 編年資料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왔다. 그런데 “太平壬戌”銘 瓦片의 출토 상황 등을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이 瓦片이 출토된 건물지의 건물은 龍溪里窯가 운영되던 시기에 축조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太平壬戌”銘 瓦片은 龍溪里窯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編年資料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太平 壬戌年(1022)은 龍溪里窯의 전체 운영기간에서 중반부에 가까운 시기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龍溪里窯址의 발굴 결과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또 다른 문제가 塼築窯의 실재 여부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龍溪里窯址를 조사한 결과 거기에서 여러 개의 벽돌편을 수습하였다. 이 점으로 미루어 龍溪里窯가 開窯하고부터 일정 기간 동안 塼築窯를 운영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龍溪里窯址에서 발견되는 벽돌편이 매우 희소하다는 점에서 볼 때, 그 기간은 용인시 西里窯나 여주군 中岩里窯 등과 비교하여 짧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는 우리나라 초기청자의 전개과정의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우선 “太平壬戌” 銘 瓦片은 우리나라 초기청자의 가장 대표적인 표식적 유물인 해무리굽碗의 전개과정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즉 이 瓦片을 통하여 볼 때, 남서부지방의 해무리굽碗이 內底曲面式에서 內底圓刻式으로 변화하는 시기는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이 시기부터 10세기 말-11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남서부지방의 초기청자요에서는 內底圓刻式 해무리굽碗이, 중서부지방의 初期靑磁窯에서는 內底曲面式 해무리굽碗이 竝列的으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龍溪里窯가 중서부지방과 남서부지방의 초기청자요 가운데 어느 쪽의 영향으로 開窯 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이 점은 龍溪里窯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해와 남서부지방 초기청자요에 대한 보다 많은 발굴이 이루어진 후에 구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